조선인 모국 방문단 입경
이승만과 안창호는 동학지우(同學之友)로
2~3차나 서신으로 충고했다고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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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조선인 회장 이동우(李東祐)씨 이야기

중국 길림에 재류하는 조선인 21명은 오래간만에 고국 산천의 반가운 풍과에 접하면서 지난 27일 아침에 경성에 들어왔는데, 그 일행 중에는 길림 태생으로 모국의 물정을 처음보는 이도 2명이 섞였는데 이들은 길림 조선인 거류민회의 알선으로 농사는 쉬는 시기를 이용하여 고국의 최근 사정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일행의 인도자인 길림 조선인민회장 이동우 씨는 다음고 같이 말하더라.

“길림 총영사관 내에 있는 조선 사람은 36,000명이요 호수는 3,920호인데, 그들이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앞녀과 모루히네를 밀매하는 자가 대부분인 것 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나, 길림에는 그러는 자는 전혀 없다. 원래 고국을 떠날 때에 맨주먹으로 나왔으므로 농업자금이 뜻과 같이 융통이 되지 못하여 조선 농민은 거의 전부가 중국 사람 측에서 공급을 받는 중이고, 그것도 8푼이나 1할의 고리(高利)를 쓰므로 뼈가 부러지도록 노동을 하여 그 수입은 극히 근소하여, 정상이 실로 참혹한 경우에 있는 길림 지방은 마적의 약탈과 중국병(中國兵)과 조선 독립단 등의 협박을 받아 연년히 받는 피해가 막심하다. 1919~1920년 경에는 조선 독립이라 하는 새로운 표어에 일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을 맞았으므로 재물을 제공한 자도 많았는데, 지금에도 그들이 사방에 횡행하며 입으로다 독립을 부르짖고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들의 사복(私腹)을 채우므로, 주민들은 점차로 자각해 옴에 따라 그들을 미워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대총통 이승만(李承晩)과 노동 총판(總辦) 안창호(安昌浩)와는 동학지우(同學之友)이므로 그 무모한 계획에 대하여 두세 차례 서면으로써 권고한 일도 있었다. 길림에서는 거류민회와 영사관이 중심이 되어 그러한 무리를 선도(善導)하기에 노력하는 중인데, 근일에는 그들 중에서 자기의 무모함을 황연(晃然)히 깨닫고 양민으로 귀순이 되어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운운(云云)

일행의 일정은

4월 1일에 경성을 출발

길림(吉林) 조선인 모국관광단 일행은 28일부터 4일간 경성부 내와 인천을 견학하고 4월 1일 오전 8시에 경성을 떠나 개성(開城), 평양(平壤), 신의주(新義州), 봉천(奉天) 등 각지를 순차로 견학하여 각 하루씩 유숙하고 길림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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